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 (문단 편집) ==== 중국 ==== [[삼대기율 팔항주의]]를 들먹이며 [[중국 인민지원군]]은 범죄가 없는 깨끗한 군대였다고 알려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공군에 비해 북한군이 더욱 악랄했기 때문에[* [[인민재판]] 문서에 나오듯, 특히 초창기 북한군의 점령지 관리는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상대적으로 비교되어서 중공군이 그나마 좀 나았다는 식의 증언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기도 하고, 한편 중국 지휘관들이 아군도 자주 처벌[* 전쟁 범죄를 저지른 아군을 처형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6.25 회고록을 보면 중국군을 꽤 고평가한 장군들이 있다. 그런데 학살이나 약탈을 명령하지 않았는데, 자기들 마음대로 하면 처벌하는 게 일반적 군대라 딱히 특별한 건 아니다. ]해서 나온 이야기에 가깝다.[* 어떤 중년의 미군은 젊은 중공군 병사가 몰래 풀어줘서 본대로 복귀할 수 있었는데, 중공군 병사가 풀어준 이유가 압권이다. (그 병사가 한 말) “난 어릴 적부터 '''[[중일전쟁|항일 동지들이었던]]''' 미국인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이제 그 소원을 이뤘으니 어서 여기서 떠나라.”] 중국군도 식량을 배급하지 않고 행군을 시키거나, 낄낄 웃으며 포로들을 쏴 죽이거나, 채찍 등으로 구타, 부상당한 포로들을 산 채로 불태우는 등 각종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이하는 전부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유엔군 장병들이 증언한 내용이다. ''''6·25전쟁''''으로 부르는 대한민국과 달리 중국은 미국에 대항해 북한('조'선)을 지원했다는 뜻의''' '항미원조 전쟁''''이라고 부른다.[[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9761252&memberNo=38064603|중국의 6.25 전쟁 시각]] > '''수용소에 있던 포로 일부는 손이 뒤로 묶인 채 살해되었고, 부상당한 포로들은 수류탄 혹은 몸에 기름을 부어 불을 붙여 태워 죽였다.''' > 중국군에게 잡힌 유엔군 포로 중 건강하거나 걸을 수 있는 상태의 부상자들은 수용소까지 걸어갔고, 심각한 부상을 입은 자들은 그 자리에 버려두고 가거나 총살시켰다. 포로들이 죽은 이유는 대부분 위생 관리 부재, 식량 부족, 이질, 폐렴 등이었다. '''중국군들은 소량의 식량을 주거나 아예 주지 않았고, 배급된 식량 또한 영양가가 없었다.''' > 또 중국군은 포로들을 자그마한 철장에 가두고 살을 에는 추위에 맨발로 서 있게 하거나 찬물에 몸을 담갔다 빼게 하곤 했다. 적군은 포로들을 두들겨 패고 물로 가득한 구덩이에 한동안 집어넣기도 했다. > 죽음의 수용소들 중 한 곳은 '동굴'이라는 이름의 수용소였다. 이곳에 보내진 포로들은 담요도 없고, 화장실 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생활했다. 벨리 아타소이 병장은 이러한 포로 수용소들 중 한 곳인 450m짜리 터널에서 며칠을 지냈는지 모르며, 이틀에 한 번 주 모래 섞인 보리밥을 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한다. >---- >'[[터키인]]이 본 6·25전쟁' 지음: 알리 데니즐리, 옮김: 이선미, 감수 이난아 > 중국군은 부상당한 나를 다른 포로들과 함께 차에 태우고 새끼줄로 묶었다. 차는 여차하면 전복될 것만 같았다. 자동차 바퀴는 울퉁불퉁한 돌길 위를 지나갔다. 부상자들 중 자동차에서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떨어진 사람은 다시 차에 태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총을 쏴 죽여 버렸다. '''중국군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흑인 미군 1명이 떨어졌다. 그는 밧줄을 붙잡고 차 뒤에 질질 끌려오다가 힘이 빠지자 그 줄을 놓았다. 중국군 중 1명이 그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그러다 중국군 1명이 내게도 총을 발사했다. 총알이 내 머리카락 사이에서 머리에 닿을 듯 지나갔다. >---- >[[터키군]] 무자페르 쉔부르치 하사의 증언 > [[장진호 전투]] 제3일째인 11월 30일 저녁까지 사망자는 수백 명에 이르렀으나 땅은 얼어 붙어서 파지지 않았다. 시체들은 잘라 놓은 목재처럼 3겹, 4겹으로 쌓아 올려졌다. 12월 1일 오후 1시를 기해 포위 돌파전은 오후 늦도록 일대 도살극을 연출했다. 이날 오후 늦게 대열이 유린되자 '''중국군은 부상병들이 실려 있는 트럭으로 기어 올라가서 무력하게 누워 있는 아군 부상병들을 쏘고, 찌르고 했다.''' 또 어떤 차에 휘발유를 끼얹어 '''부상병들을 산 채로 불태우기'''도 했다. 대열을 벗어나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명백하고 완전한 살인이었다. 나는 열두 평생을 살아도 다 하지 못할 너무도 많은 아픔과 피, 죽은 자와 다친 자들을 보았다. >---- >[[미 육군]] 7사단 제임스 블롬 하사의 증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